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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연·이장균 - 이런 동업 보셨나요

[창업자로부터 온 편지]유성연·이장균 - 이런 동업 보셨나요

등록 2017.12.14 15:36

수정 2017.12.15 08:25

이성인

  기자

편집자주
‘창업자로부터 온 편지’는 한국 경제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대기업 창업자들부터 미래를 짊어진 스타트업 CEO까지를 고루 조망합니다. 이들의 삶과 철학이 현직 기업인은 물론 창업을 준비하는 젊은 세대에게도 좋은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유성연·이장균 - 이런 동업 보셨나요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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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불에 익혀먹던 가래떡, 쫀디기, 달고나
연탄재 위에 눈을 붙이고 굴려 만들던 눈사람
새벽마다 연탄불을 가시던 부모님
혹은, 가슴 아팠던 연탄가스 중독···

연탄, 하면 이처럼 60~80년대 추억과 애환을 떠올리는 분들 많을 텐데요. 실제로 연탄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기, 서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해온 국민 연료였습니다.

이 연탄과 함께 성장해온 기업도 있습니다. 바로 삼천리인데요. 서민의 연료를 만들었기 때문일까요? 그 역사 또한 ‘정’(情)에서 출발했습니다.

송은(松隱) 유성연과 석원(石園) 이장균, 두 선대회장 이야기입니다.

1920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난 이장균 회장. 유학자 집안 출신이었지만 일제강점기로 가세가 기울어 가정형편은 좋지 못했습니다. 광복 이후엔 소련군의 농지개혁에 전 재산이던 농지마저 뺏겼습니다.

이에 이 회장은 함흥으로 건너가 소련군을 상대로 장사를 시작합니다. 이때 만난 사람이 바로 유성연 회장. 역시 함주 출신(1917년생)인 유 회장도 시대적 혼란에 몸담았던 교직을 그만두고 식료품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

소련군 주둔 하의 함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의기투합, 어려운 시기를 함께 돌파해가며 형제 이상의 관계로 발전합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각각 다른 곳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으론 서로를 간직하고 있었지요.

포항으로 피난 온 이 회장은 무연탄 유통업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연탄이 유망하리라 판단, 연탄사업에의 투신을 결심합니다. 믿을 만한 동업자를 찾기로 한 그에겐, 오직 유 회장만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 유 회장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고통 받으며 병마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당시 참담한 심정을 적은 편지를 이 회장에게 보내기도 했는데요.

이 회장은 편지를 받자마자 발신지인 해운대의 한 여관을 찾아갑니다. 이 회장은 그때 유 회장과의 재회를 이렇게 회고한 바 있습니다.

“자정 사이렌이 울릴 무렵, 그는 퉁퉁 부은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그날 밤을 같이 새우며 그의 고통과 슬픔을 함께함으로 해서 그에 대한 나의 우정과 신뢰감은 더 깊어졌다.”

유 회장도 훗날 자서전을 통해 가슴속으로부터 복받쳐 오른 무엇인가 뜨거운 것에 용기를 얻어 병마를 이겨냈다며 그날을 서술했지요.

2년 후인 1955년, 두 사람은 우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동업에 임합니다. 첫 상호는 삼천리연탄기업사. 나이가 많은 유 회장이 사장직을, 이 회장이 부사장직을 맡습니다.

“우리 제품으로 삼천리 반도 전체를 석권하겠다.”

두 사람은 이때 3가지 원칙을 정해 문서로 남겼습니다.

▲첫째, 전 계열사 지분을 양가가 동일한 지분으로 소유한다.
▲둘째, 어떤 비율로 투자하든 이익은 똑같이 나눈다.
▲셋째, 한쪽이 반대하는 사업은 절대 하지 않는다.

문서엔 한 가족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그 가족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서약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둘의 인연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이후 삼천리는 연탄을 매개로 서민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합니다. 도시가스, 발전·집단에너지, 녹색성장 사업 등을 아우르는 종합에너지그룹이 된 지금도 ‘국민 생활 밀착형 기업’으로서의 명성은 변치 않았지요.

1997년, 삼천리를 일군 이 회장이 작고합니다. 유 회장은 장례식 후 양가 2세들을 불러 욕심내지 말고 혈육처럼 지내길 당부했지요. 그의 말대로 삼천리 ‘한 지붕 두 가족’의 동업은 원칙대로 잘 이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떠난 이 회장이 그리웠을까요? 유 회장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작고합니다(1999년).

어려운 시절 맺은 연을 간직하고 또 발전시켜온 두 사람. 돈과 이익만 좇다 혈육마저 저버리기 일쑤인 시대의 우리에겐, 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1순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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