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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테마 에세이|<바가바드기타>] ⑧ 제1권 10행

“당신은 자신의 생각을 장악하십니까?”

내가 하고 있는 이 말은, 내가 의식해서 하는 말인가? 아니면,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심연에서 나오는 말인가? 수피시인 루미의 말을 빌리자면, 누가 내 입을 가지고 말하는가? 내가 저 대상을 보고 있는 이 시선은, 내가 보고 싶어서 보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존재가 나의 눈을 움직여, 그것을 보도록 유도했는가? 나는 과연 나의 주인인가?

인간은 자신이 몸의 움직임, 말, 생각을 장악하며, 자신의 주인인가? 혹은 나의 주인은 내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서 행위를 조절하는 무의식인가? 무의식은 인간 내면에 숨어있어, 어둠, 폭력, 창의성, 잠재력, 혹은 신과 연결되어 있는 어떤 것인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마다, 각자 다른 의미로 ‘무의식’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우리의 언행은 무의식에서 잠재되어 있다가, 의식이란 통로를 통해 표현된 것들이다. 고대인도인들은 무의식이 인간이 회복해야할 진짜 의식이며 의식은 불완전한 경험과 이기심이 만들어낸 허영이며 허상이라고 말한다. 무의식은 우리가 흔히 말로는 담을 수 없는, 우리의 몸, 정신, 그리고 영혼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알 수 없는 미지未知이며, 아무기 과학이 발전해도 여전히 99% 미지로 남아 있을 만큼 광대한 어떤 것이다. 무의식은 마음의 활동 전부를 의미하며, 의식은 그 빙산의 일각이다.

서양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가장 먼저 의식하고 학문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신-플라톤 주의자 플로티노스(205-270년)다.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무의식’을 발견한 철학자다. 그는 <엔네아데스>라는 저작에서 인간이 영혼과 지성을 의식적으로 생각해 내지 못하는 이유를 탐구하였다. 그는 영혼에 있는 모든 것이 반드시 인식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의식적 인식의 부재가 마음활동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무의식의 존재를 감지하였다.

5세기 최초의 심리학자이며 자서전 작가인 성 어거스틴은 깊은 묵상인 ‘쎄오리아theoria’를 통해 무의식의 존재를 감지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의식이 마음을 모두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라고 여겼다. 무의식이 의식 밖에 있는지 아니면 의식 안에 있는지 탐구하면서 부인할 수 없는 무의식의 광대함을 높은 산맥의 정산 혹은 바다의 출렁이는 거대한 파도, 혹은 위대한 강들의 굽이침, 별들의 운행과 비교하면서, 그 존재를 부인할 수 없이 거대하지만 파악하기 힘든 어떤 것이라고 여겼다.

인간은 현대가 시작하는 20세기 전에, 인간의 의식과 이성이 인간이 지닌 최선의 지성이며 원칙이라고 스스로 자화자찬하였다. 스코틀랜드 철학자이자 이론물리학자인 랜슬롯 로 와이트Lancelot Law Whyte (1896-1972)는 의식과 무의식은 별도의 공간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론물리학자로, 이 둘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의견은 칼 융의 주장이기도 하다. 그는 무의식은 잃어버린 억압된 기억이 모여 있는 창고이며, 그 사람의 성향, 충동, 그리고 욕망의 모체로 파악했다.

융의 천재성은 무의식이 사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집단의 오랜 경험의 축적인 집단무의식이라고 주장한데 있다. 집단무의식은 의식이나 개인의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 무의식은 인간이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도구다. 프로이트와 융 이후, 무의식에 관한 근본적인 시선의 변화를 일으킨 인물은 오스트리아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1899-1992)다. 그는 무의식은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는 '서브-콘셔스니스sub-consciousness' 즉 ‘하-의식’이 아니라 ‘슈퍼-콘셔스니스super-consciousness'라고 명명하였다.

<바가바드기타> 제1권 10행은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의식의 세계와 오감으로 인식할 수 없지 의식을 능가하는 초의식의 세계에 대한 은유다. 여기 의식의 세계가 전부라고 믿는 비슈마가 이끄는 카우바라의 군대들과 무의식의 세계의 훈련을 통해 의식의 세계를 장악하려는 비마가 인도하는 판다바 형제들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학자들은 이 구절을 축자적으로 해석하여 그 의미를 곡해해왔다. 여기 이기심의 화신인 카우바라 왕국의 영웅 비슈마와 해탈을 수련하고 있는 판다바 왕국의 영웅 비마의 군대에 대한 묘사다.

अपर्याप्तं तदस्माकं बलं भीष्माभिरक्षितम्
पर्याप्तं त्विदमेतेषां बलं भीमाभिरक्षितम

aparyāptaṁ tadasmākaṁ balaṁ bhīṣhmābhirakṣhitam
아파르야프탐 타다스마캄 발람 비슈마비라크쉬탐
paryāptaṁ tvidameteṣhāṁ balaṁ bhīmābhirakṣhitam
파르야프탐 트비다메테샴 발람 비마비라크쉬탐

(직역)
“비슈마가 보호하는 우리 군대의 힘은 무한하다.
그러나 비마가 방어하는 그들 군대의 힘은 유한하다.”

(의역)
“비슈마가 이끄는 카우바라 군대는 의식의 세계로 이기심과 감각의 유혹으로 구성된 군대다. 무수히 많은 용사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육체와 육체의 감각에 국한되어 있어, 그 힘이 무한한 것 같이 보이나, 모이지 못하고 사분오열하여 힘이 없다. 반면에 비마가 이끄는 판다바 군대는 비슈마 군대에 대해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세계를 조절하는 무의식을 장악하고 연마하기에 그 힘이 유한하지만 오히려 대단하다,”

비슈마는 ‘아스미타’amitta 즉 ‘이기심’의 화신이다. 그는 감각으로 이루어진 모든 기관을 관장하는 사령관이다. 비슈마의 임무는 오감을 통해 육체를 자극하여 쾌감에 중독된 몸과 그 몸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이기심의 수많은 요구를 모두 수용하여 조절하는 일이다. 이 육체를 기반으로 한 의식은 무수한 쾌락의 유혹들을 자극하고 그리워하도록 조절한다. 비슈마 군대에 이기심이 없다면, 이 군대의 기강은 무너지고 군인들은 사분오열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이다.

반면에 비마가 이끄는 판다바 형제의 군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력하다. 비마는 감각의 자극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기심과는 달리, 인간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힘에 의존한다. 인간이 삼매경으로 진입하면, 감각에 의존하는 의식에서 물러나 원초적인 자아이며 신적인 자아인 ‘푸루샤’purusha와 조우하여 하나가 된다. 개별적인 이름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우주적인 자아와 일치한 개인이 된다.

원초적인 자아인 우주적인 자아로 변신한 자아를 표현하는 문구가 있다. ‘아함 브라흐마스미Ahaṁ Brahmāsmi’다. 이 문구를 번역하면 ‘나는 우주다’ 혹은 ‘나는 우주전체와 연결되어 있는 부분이면서 우주 전체이다’라는 뜻이다. 이 문구가 등장하는 <브리하다란야카 우파니샤드 Brihadaranyaka Upanishad> 1.4.1-10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인간처럼 생긴 하나의 자아(아트만)이 있었다.
그가 주위를 보니 그 어느 것도 자신처럼 생긴 것이 없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말은 ‘내가 여기 있다!’다.
그것으로부터 이름 ‘나’(aham)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제 질문이 생겼다.
‘사람들이 그들이 ‘우주’(brahman)을 알아 전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전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주는 무엇을 인식했는가?’
처음에 이 세상은 단순히 ‘우주’이었고, 우주는 자기 자신(아트만)만 알았다.
그것은 ‘나는 우주다Ahaṁ Brahmāsmi’라고 생각했다.”


비마의 군대는 소수이며 제한적이지만, 우주 전체를 포용할 수 있다. 그 고백이 ‘나는 우주다’이다. 반면에 비슈마의 군대는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육체의 쾌락을 요구하는 이기심으로 수 많은 병력을 소유한 것 같지만, 오합지졸이라 힘이 없다. 당신은 비슈마의 군대처럼 부산하고 바쁩니까? 혹은 비비마의 군대처럼, 조용하고 간결합니까?

사진

오후 태양 빛이 깃든 몽마르트, 프랑스 인상파 화풍의 선구자 카미유 피사로 (1830–1903) 유화,1897, 74 cm x 92.8 cm 에르미타주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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